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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복싱 역사상 가장 논란의 경기! 복서 김득구

by Curiopod 202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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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복싱 역사에 그 이름을 새겨놓은 권투 선수가 있습니다. 

김득구는 그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의 짧지만 빛나는 삶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김득구는 1956년에 강원도 고성에서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며,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세 번의 결혼은 그의 어린 시절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김득구는 어릴 때부터 힘들게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구두닦이, 투어 가이드, 그리고 다양한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가며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천호상업전수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김득구는 동아체육관에서 권투를 처음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습니다. 그의 권투 경력을 점점 쌓아가다가, 1980년 12월에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이기고 대한민국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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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28일, 김득구는 OPBF(동양 태평양 복싱 연맹) 챔피언 전에서 김광민을 상대로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여 동양 챔피언이 되었으며, 이로써 세계 복싱 협회에서 그의 세계 랭킹을 1위로 정했습니다.

김득구의 승리는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한국 권투계에서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경기를 치르는 기회는 드물었고, 그의 세계 랭킹 1위가 석연치 않은 부분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의아한 세계랭킹은 프로모터 밥 앨런의 농간 때문이었습니다. 김득구의 기량이 아직 세계적인 수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흥행성을 갖춘 챔피언 맨시니가 패하는 모습을 볼 수 없던 밥앨런이 랭킹을 조작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82년 11월 13일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 팰리스에서 열렸습니다.

이 경기에서 그는 레이 "붐붐" 맨시니(Ray Mancini)와 타이틀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는 그의 삶과 권투 경력에서 비운의 순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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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구는 이 경기를 위해 필사적으로 훈련했으며, 그 경기에 대한 각오는 비상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기면 국제 스포츠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는 김득구에게 불운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14회의 라운드에서 맨시니에게 KO 당하게 되면서, 그의 머리 상해가 너무 심각하여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그의 희생은 스포츠 안전과 규정 개선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습니다.

김득구는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과 투지는 스포츠의 가치와 안전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과 국제 스포츠계에서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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